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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바보의사 장기려 박사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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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준비를 하다가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린 성산 장기려 박사의 이야기에 대해 조사하게 되었다. 오늘날 건강보험제도의 기틀이 된 민간 의료보험 조합을 만들고, 영세민을 위한 여러 일을 했던 그에 대해 정리해 보고, 수업자료로 활용해 보고자 한다. 

 

1. 월급을 통째로 내어준 사람

명동 성당 앞 성모병원에서 한 걸인이 돈을 달라고 했다. 장기려박사는 월급 받은 봉투를 통째로 건넸다. 이 안에는 마침 수표가 있었다. 걸인은 은행에서 수표를 사용하고자 했다. 그런데 은행원은 이 걸인이 수표를 훔친 것이라고 확신했나 보다. 행색으로 판단한 것이자. 은행은 분실된 수표의 주인은 찾았다. 장기려 박사는 내가 준 게 맞다며 해명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생각을 담은 글을 소개한다.

장기려 어록, '유물론자에게 전하고 싶은 요한의 사랑의 철학', ('부산모임' 1974년 8월호 수록)

사랑은 다른 사람을 위한 죽음이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은 사랑이다. 

그러므로 참 생명은 죽음에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목숨을 아끼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 

잘 죽는 자가 잘 사는 자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자만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생명은 죽음에 있다. 사랑의 죽음은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의 사랑의 철학은 생명철학의 일대 혁명이다. 

 

2.  '나는 아직 가진 게 너무 많다'라고 말한 바보

한국 외과학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명성 높은 의사였던 장기려 박사. 그는 수십 년간 의사이자 교수로 일했으며, 여러 병원을 세웠다. 그럼에도 자신의 사적 이익을 탐하지 않았다. 평생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며, 죽는 날까지 집 한 채 없는 청빈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한국 전쟁 때에는 평양에서 부산으로 피난을 왔으며, 천막병원을 진전하며 남몰래 선행을 베풀었다고 한다.  교회 창고를 빌려 '복음 병원'을 세운 그는 유엔에서 원조받은 약을 가지고 피란민을 돌보았다. 치료비를 받지 않는다는 소식에 많게는 하루 200명까지 환자가 몰렸다고 한다. 형편이 어려운 입원 환자에게는 '밤에 몰래 병원 뒷문을 열어둘 테니, 도망가라'라고 말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영양실조에 걸린 환자가 돈이 없어 먹을 걸 구할 수가 없다고 하자, 처방전에는 ' 이 환자에게 닭 두 마리 값을 내어달라'라고 처방했다고 한다. 

 

그는 실력 있는 의사였다. 

우리나라 최초로 간암 환자의 간암 덩어리를 떼어내는 데 성공했다. 간암 환자의 간 대량 절제술에 성공하는 등 간의 혈관과 미세구조에 대한 연구 업적을 쌓기도 했다. 자신의 영달과 명예만을 위해 살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누구보다 아픈 사람들, 누구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는 늦은 나이 당뇨병에 시달리면서도 20여 평에 불과한 고신대 병원 옥탑방에서 지내며 '죽었을 때 물레밖에 안 남겼다는 간디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가진 것이 너무 많다'라고 하곤 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의사가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을까?

그는 이면과 표면의 경계를 허문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3. 평안북도 사람, 평생의 아픔이 있었던 사람

장기려는 1911년 평안북도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교사로서 헌신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집안 형편이 나빠져서 학비가 저렴했던 경성의학전문대(지금의 서울대 의대)에 진학했다고 한다. 일본인들과 일하고 싶지 않았던 장기려는 평양 연합 기독병원으로 부임하고, 평양에서 의사 생활을 했다. 국군이 평양을 수복했을 때에는 환사 수송용 버스로 먼저 출발했는데, 함께 오기로 했던 가족과 같이 오지 못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이산가족이 된 것이다. 

 

1985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에는 정부가 특별상봉을 장기려 박사를 위해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장기려 박사는 바보 의사인 만큼, 다른 이산가족들에게 불공평한 처사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아들 장학용 또한 유명한 의사로 북한에서 활약했다고 한다. 죽기 직전까지도 아내를 그리워하던 장기려박사는 평생 그 부인만을 그리워하며 독신으로 지냈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재혼을 권유해도, 아내를 생각하며 한사코 고사한 그였다. 그를 흠모한 수많은 이들의 유혹에도 굴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65년의 세월 동안 인술을 베풀며, 봉사하고 무소유의 삶을 실천했던 장기려 박사. 조사하다 보니, 그는 감히 평가하지 못할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의 이 같은 헌신에는 신앙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가 1995년 12월 25일 소천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세상에는 네 종류의 인간이 있는 것 같다. 

마음과 물질이 모두 가난한 자, 물질은 가난하나 마음이 풍족한 자, 물질은 부자이나 마음이 가난한 자, 그리고 마음과 물질이 모두 풍족한 자. 

부자와 빈자를 나누는 것은 돈이 아니라, 돈에 대한 자세가 아닐까 싶다. 

돈을 통해, 이 세상을 좀 더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 수 있다. 돈은 풍요를 위한 수단일 뿐,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돈을 이용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는 마음이 가난하다. 

이 논리에 따르면, 세상에 진짜 부자가 되기는 쉽지 않다.

 

물질 만능주의가 판을 치는 요즘,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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