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민주화와 자주독립을 위해 투쟁한 운암 김성숙 선생님의 삶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 있습니다.
"부정과 불의에는 추호도 굽힘 없이 살다가,
1969년 71세로 별세하자, 모든 동지들이 울며 여기 장례 지냈다."
1. 김성숙의 탄생과 성장
평안북도 철산에서 태어난 운암 김성숙은 1919년 양주에서 3. 1 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인이 설립한 학교에 아들을 보내지 않겠다고 할 정도로 독립 의지의 피가 흐르는 가문이었습니다.
운암 선생은 독립군이 되기 위해 만주로 건너갔지만,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그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25세부터 스님으로 북경에 유학을 하면서, 중국 각지에서 항일 투쟁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중산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베이징, 광둥, 상하이 등에서 광복 운동에 앞장섰으며, 여러 단체들을 통합한 '조선민족전선 연맹'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국의 해방을 위한 길은 험난하기만 했습니다.
2. 독립투사의 어려움
심지어 단돈 200원이 없어, 쌀을 살 수 없었던 김성숙은 자신이 '독립운동을 하고 돌아다니면서도 가족을 굶기고 살고 있구나.(1955년 2월 23일 자 운암의 일기)'라고 개탄하며 일기를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일기를 쓰던 운암 선생의 마음을 감히 헤아려 봅니다.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자식에게 미음 한 그릇 주지 못하는 부모의 가슴은 얼마나 미어졌을까요?
아마 매일매일 몰라보도록 크던 운암 선생의 아이는 그날도 자지러지게 울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무엇이든 주고 싶어 운암 선생은 자신의 빈 지갑을 닳고 또 닳도록 열어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가 200원을 빌려, 쌀을 사들고 왔을 때, 그 모습을 바라보던 마음은 얼마나 시렸을까요?
운암 김성숙이 48세 되던 해, 드디어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되었습니다.
평생을 독립운동과 민주화를 위해 애썼지만, 자신보다 남을 위해 살던 그였습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그의 말년에는 가난과 병고밖에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치료할 약은 물론이고, 그에게는 잘 곳도 변변치 않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구의동에 있는 한 동료는 자신의 집 마당 귀퉁이에 11평짜리 가건물을 지어주었습니다.
독립운동가 구익균 선생이 제공한 20평 대지와,
지인들이 모금한 20만 7천500원으로 1964년 건립된 그의 집.
그 집의 이름은 '비나 피하라'는 의미의 피우정(避雨亭)이었습니다.
그는 1969년 4월 12일, 71세의 나이로 그 고귀했던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자신의 독립운동 사실을 인정받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하였고, 민족이 분열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그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가 치렀던 수많은 옥고와, 억압 속에서도 그는 민족을 위해 굽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계속 되풀이될 것이고,
모든 인간은 자유하고 평등하다는 그 원칙을 우리는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피우정에서 비를 피하면서도, 돈 200원이 없어 배를 곯으면서도
그가 지키고자 했던 그 애국의 정신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의 일기는 이렇게 그의 생각을 남기고 있습니다.
'나는 이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나라를 위해서 희생할 수만 있다면,
나는 나의 할 일을 다한 것이다.'
- 1964. 2. 13. 운암 김성숙의 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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