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을 맞이하는 다짐
끄적끄적 나의 생각과 느낌을 담았다가, 때로는 공부한 게 아쉬워서 다른 선생님들과 나누고 싶어 글을 올린 지가 어느덧 3년이 훌쩍 넘었다.
2020년 코로나를 기점으로 하여, 나에게는 참 버거운 시간이 찾아왔다.
누구든 그런 고비가 인생에 한 번쯤은 온다고 하지 않는가?
가장 어둡고 길었던 추운 터널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사랑' 덕분이었다.
아마도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이곳에 온 이유는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확신으로 바뀌는 계기였다.
나만 쓰기 아까워서 올린 자료들에 선생님들이 잘 썼다는 반응을 해 주실 때마다, 정말 뛸뜻이 기뻤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쓸모 있는 사람이구나.
나 스스로를 못났다고 비하하고, 학대할 필요가 없었구나. 그저 나의 일을 묵묵히 하는 것만으로도 살아갈 가치가 있었구나.
그러면서 나는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 그리고 지금도 얻고 있다.
저번 학기에는 차를 담아 먹을 것 같지 않던 교실 주전자의 기능을 살렸다.
그 안에 콩을 담아 콩나물을 키운 것이다.
창고에 박히거나, 쓰레기장으로 내던져지거나 했을 주전자가
아스파라긴산을 충분히 머금은 해장용 콩나물을 충실히 키워냈다.
1년 동안 내가 품은 우리 아이들은 내 볼품없는 기능이 무색할 정도로 쑥쑥 자라났다.
옆의 친구를, 선생님을, 부모님을 사랑할 줄 아는 아이로.
그 좁은 공간에서도 자기의 머리를 들이밀며 쑥쑥 위로 커갔다.
어떻게 하면 이 아이들에게 한 번이라도 재미있는 경험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 보니, 1년이 어느덧 훌쩍 가버렸다.
체력 관리를 못한 탓인지, 잘한 탓인지. 개학 전날에서야 코로나에 처음 걸렸다.
그토록 두려워하고 무서워했던 코로나. 걸려보니 별 거 아니었다.
어쩌면 세상 모든 것이 직접 부딪히면 별 거 아닌데. 왜 그토록 걱정했을까.
독감만큼 아프고 나니, 교실 바닥에 이런 선물이 있었다.
코로나 이후 교실로 돌아올 선생님을 생각하며, 아이들이 교실 바닥에 남긴 메시지다.
그날은 비몽사몽 전화를 받아서 정신이 없었는데, 한 아이가 쉬는 시간에 몰래 하이톡으로 전화를 해 왔다.
울먹이는 목소리였는데, 선생님 오늘 안 오시는 거냐며 아쉬운 소리를 했다.
"선생님.... 많이 아파요...? 왜 안 와요.... 헝헝..."
당시에는 수업시간 아니냐며, 당장 핸드폰 끄라고 투덜댔다.
하교하고는 아이들의 폭탄 문자가 왔다.
"선생님, 코로나 아파요?"
"선생님, 독감이었다면서요... 왜 아파요..."
"선생님. 저희가 말 안 들어서 아프신 거예요??"
"저도 코로나 걸려봤는데, 닭죽이 코로나엔 좋대요!(?)"
아이들은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자리를 비운게 처음이니 놀란 건가? 뭔가 아쉬운 게 있어선가? 꼬아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사랑이 느껴졌다.
그러던 차에 이런 메시지까지 보니, 마음이 찌릿한 게 눈물이 왈칵 나려 했다. 하지만 아이들 앞에선 꾹 참았다.
내 직업에 감사함을 다시금 느꼈다.
어느 직장에서 이렇게 순수하고, 아무런 조건 없는 사랑을 넘치게 충분하게 받을 수 있으랴!
세상이 자본주의 위주로 돌아가다 보니, 가끔은 각박한 세상살이에 직장인 월급이 너무 적지 않나 아쉽다는 목소리도 많다.
하지만 직장에서는 생각보다 돈 외에도 많은 가치가 존재한다. 그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다 보니, 가끔은 갈등이 있지만.
돈으로 살 수 없는 이런 사랑의 가치를 새기며 묵묵히 나아가면 될 일이다.
이 글을 보는 많은 분들에게도 작은 위안이 되었으면 한다.
아이들은 그 누가 되었던 선생님을 사랑한다.
(1년 지나면 아이들은 대부분 담임 선생님의 편이 된다)
내년에 이 아이들이 진급하면, 또 나는 그 담임 선생님에게 밀려 기억의 뒤안길로 사라지겠지.
그래도 괜찮다.
누군가의 마음에 불을 지핀 따뜻한 연탄이 되었다면.
발로 차이고 부서져도 나의 몫은 다 한 것이니까.
올해도 따뜻하게 불타야겠다.